독서

책/버지니아 울프『런던을 걷는 게 좋아...』

숫양 2022. 8. 30. 17:47
버지니아 울프 (Wikimedia, by George Charles Beresford)

술 마시다 버지니아 울프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난다. 실없는 농담과 객기를 즐기던 시절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를 아느냐고. 작가 이름은 아는데 작품은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읽지 않았다는 얘기다. 누군가 말했다. 버지니아에 사는 늑대잖아. 욕과 조롱이 쏟아진다. 헛소리 말고 술이나 마시라고 한다. 버지니아주에 늑대가 살긴 사나 싶다. 버지니아 울프를 안 지는 좀 됐다. 소설을 읽긴 했다. 감흥이 크게 없었을 것이다. 잘 읽혔다면 대표 작품 한 권 정도는 샀을 테니까.

몇 해 전 중고서점에 들렀다. 크기가 작고, 표지가 노란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굳이 사지 않아도 될 만큼 분량이 적은 책이었다. 제목이 『런던을 걷는 게 좋아,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였다. 제목이 내용 전체를 아우르는 듯했다. 책을 집어 들고 한 장씩 넘기는데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당시 런던 지도였다. 책 중간에 낯익거나 낯선 건축물 사진도 있었다. 역시 과거에 촬영한 흑백사진이었다. 울프가 이 글을 쓴 1930년대 런던 시가지와 건축물이었다. 90년 세월이 흘렀어도 건축물은 그대로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같은 곳 말이다. 결국 책을 샀다.

수필 6편이 담겼다. 런던 거리와 건축물 등 풍경을 묘사했다. 사진이 없어도 사진을 보는 듯 하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울프와 함께 산책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칼라일 하우스를 묘사한 부분은 집 안에 들어가서 구석구석 장식품 따위를 보고 있는 기분이다. 세인트폴 대성당과 하원 의사당 등 현존하는 유명 건축물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롭다. 언뜻 런던 예찬 같지만, 당대 영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비판하는 글도 심심치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삶은 투쟁이고, 모든 건축물은 소멸하며, 모든 과시는 허영임을 이 촌스럽고 천박하고 번잡한 거리(옥스퍼드 거리)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버지니아 울프, 『런던을 걷는 게 좋아...』(정은문고)

영국 사회와 런던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듯 애증이 묻어난다. 런던 토박이 울프에게 런던은 삶의 근간이었지만, 그곳에서 아픈 기억도 적지 않았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영향 탓에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잡지사 편집장이었던 아버지 서재에 보관된 책을 탐독하며 작가로서 실력을 키웠다. 신경 쇠약과 우울증을 앓았고, 평생 정신 질환을 앓았다.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울프의 불우했던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다시 이 책을 읽는다. 중년의 작가 울프가 전하는 생생한 런던 이야기를 듣는다. 중년이 되어 런던을 걸어보고 싶다.

주식 투자를 잘 하자.


*『런던을 걷는 게 좋아,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정은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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