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책/이상 『권태』

숫양 2022. 9. 6. 18:00

배경은 시골이다. 1936년 무렵 시골이다. 벌써 권태를 느낀다. 뭐가 있을 리가 없다. 이런 촌에서 이상이 관찰한 풍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권태』(민음사) 속 ‘권태’ 이야기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나는 권태를 잘 안다. 외갓집에서 키우던 소가 생각난다. 소가 반추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 따분함을 느꼈다. 느려도 너무 느리다. 수필 ‘권태’에서 이상은 ‘소가 최고의 권태자’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어제까지도 죽는 것을 생각하는 것 하나만은 즐거웠다. 그러나 오늘 그것조차가 귀찮다.
이상,『권태』(민음사)


짖지 않는 개도 등장한다. 짖지 않는 개를 보며 이상은 또 권태를 느낀다. 변변한 장난감 하나 없이 놀고 있는 아이들 모습에서 권태를 발견한다. 할 일 없이 빈둥대며 보내는 일상에서 극도로 권태감을 느낀다.

권태 끝판왕이다. 무기력감이 극에 달한 모습이다. 시절이 엄혹했다. 그러나 서른 살도 채 되지 않은 청년이었다. 수필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폐결핵으로 숨을 거뒀다. 병이 가혹했다.

이것이 시체와 무엇이 다를까? 먹고 잘 줄 아는 시체…
이상,『권태』(민음사)


지금은 권태를 느낄 여유가 없다. 세상이 시끌하다. 고마운 일인가. 회사에서는 바쁜 게 좋다던데. 빈둥거리면 언제 잘릴지 모르니까. 집에서도 빈둥거리면 눈치가 보인다. 집안일을 해야 한다. 매일 반복되는 집안일에 권태를 느끼다가는 권태기가 찾아오기도 전에 안사람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

권태(쏜살문고)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 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좁은 방의 것이나 우주에 꽉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 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권태」에서
저자
이상, 권영민 (책임 편집)
출판
민음사
출판일
2017.06.30


이상 『권태』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