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는 잘 읽히지 않는 책을 애써 읽기보다 자신에게 잘 맞는 책을 읽으라고 했다. 내가 선호하는 작가가 몇 명 있다. 잘 읽히고, 읽고 나면 마음이 평온한 책을 쓰는 작가의 책은 소장한다.
박완서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다. 글이 잘 읽힌다. 소설보다 산문을 더 좋아한다. 『두부』와 『산문』과 같은 산문집은 읽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삶에 어떤 지침을 준다. 무거운 가르침이 아니라 깊은 성찰을 통해 깨달은 경험을 말하듯 들려준다.
늙어갈수록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고 적당히 따습고 적당히 딱딱한 내 집 잠자리에 다리 뻗고 눕는 것만큼 완벽한 휴식은 없다.
박완서 『호미』(열림원)
나이 들수록 과거를 회상하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진다. 새로운 경험을 찾기보다 무탈한 일상을 원한다. 그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수십 년을 함께 산 안사람에게 ‘여전히 새롭고 설렌다’라고 거짓말하고 싶지 않다. 죽을 때 서로 믿고 도와줄 수 있는 동지다.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이 혹은 누군가가 거두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
박완서 『호미』(열림원)
사십이 넘으면서 죽음에 대해 말하는 횟수가 늘었다. 장례식장에 가는 일이 잦아졌다. 사연은 저마다 다르지만, 장례식장을 나서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의 할머니는 밭에서 고추를 따고 집에 돌아와서 고추를 씻다가 돌아가셨다. 자연스럽게. 병치레도 없이. 칠십이 넘은 후로 엄격하게 식단 관리를 하셨던 기억이 난다. 『호미』를 읽으면서 작가의 경험과 나의 경험이 여러 번 교차했다. 나에게는 할머니와 쌓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할머니는 계시지 않고 할머니가 쓰던 호미도 온데간데없다.
추석에 할머니 제사를 지낸다.
#박완서 #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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