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기록

미용실에서

숫양 2022. 9. 21. 21:12


미용실에서 나는 말이 없다. 갈 때마다 다듬어 달라고만 말하고 일절 말을 하지 않는다. 딱히 원하는 머리 스타일도 없다. 지난 세월 머리에 별의별 짓을 다 해보았으나 결과는 애호박이냐 단호박이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절대 수박이 되지 않는다. 수박이 된 상상만 실컷 했다.
다른 미용실에 가거나 미용사가 바뀌어도 내 요구는 달라지지 않는다. 조금 다듬어 주세요. 머리를 자르다가 미용사가 어떤 말을 건네도 무조건 '네, 그렇게 해주세요.'하고 만다. 그러고 나서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미용사와는 결별이다. 말없이 머리를 잘 다듬어주는 미용사를 좋아한다.
말을 하지 않다 보니 눈을 감는 버릇이 들었다. 앞머리 자를 때만 감던 눈을 머리 자르는 동안 쭉 감게 됐다. 그러다 졸았던 적이 몇 번 있다. 졸지 않은 척을 했다. 미용사도 나도 당황했던 순간이었다. 그래서 컨디션이 좋을 때 미용실에 간다. 컨디션이 좋으니 눈을 뜬다. 거울을 본다. 못 봐주겠다. 눈을 질끈 감고 싶다. 옆 거울을 힐끗 본다. 일반인이다.
요즘 내 머리를 맡기는 미용사는 말이 없고 머리를 잘 다듬는다. 내가 눈을 뜨고 있어도 말을 거는 법이 없다. 그래도 미용사 눈을 똑바로 응시하지는 않는다. 눈이 마주치면 왠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다. 지난 몇 달 내 머리를 잘라준 미용사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미용사 팔뚝을 수놓은 아름다운 그림이다. 어디서 그린 그림인지 묻고 싶지만 관둔다. 나는 호박임을 한시라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나와 살아주는 분의 선호와 직관을 완전히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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